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국가는 언제 개입했나 — 구빈법·기본소득·데이터 저작권 — 역사는 반복된다 3부

🧪 짠테크 인사이트

by 짠테크연구소 2026. 4. 25. 00:16

본문

반응형

 


1부에서 공유지를 빼앗긴 사람들을 봤다. 2부에서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망치를 들었다가 교수대에 오른 것을 봤다.

그러면 그 뒤에 무슨 일이 생겼나.

결국 국가가 개입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사회가 폭발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개입이 진심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폭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느냐는 것이다. 그 차이가 역사를 가른다.

 

① 여왕은 왜 구빈법을 만들었나

1601년, 엘리자베스 1세 치세의 영국.

인클로저로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자리는 없었다. 굶주린 사람들이 길거리에 넘쳤다. 부랑자가 폭증했다. 사회 불안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엘리자베스 구빈법(Elizabethan Poor Law)이다. 인류 역사상 국가가 처음으로 "빈민을 돕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다"라고 명시한 법이다.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법은 빈민을 세 가지로 나눴다.

첫째, 일할 수 있는 빈민. 이들에게는 강제 노역을 시켰다. 일을 거부하면 감옥이었다. 둘째, 일할 수 없는 빈민. 노인, 장애인, 병자. 이들은 구빈원에 수용했다. 셋째, 요보호 아동. 고아나 빈민 아이들은 위탁하거나 도제로 보냈다.

재원은 세금이었다. 부유한 교구민에게 구빈세를 걷어 빈민을 지원했다. 지금으로 치면 복지세다.

그런데 이 법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 법 제정의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도주의. 다른 하나는 부랑자들이 일으키는 사회 불안을 잠재우는 것. 두 번째가 더 컸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요컨대, 여왕은 선의로 법을 만든 게 아니었다. 폭발 직전의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② 233년 뒤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1834년, 신 구빈법이 만들어졌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공장노동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구빈 비용이 급증했다. 귀족과 자본가들은 불만을 가졌다. "가난한 자들이 게을러서 일을 안 하는 것"이라는 시각이 퍼졌다.

신 구빈법의 핵심은 '열등처우 원칙'이었다. 구빈원에서 주는 지원은 가장 낮은 임금 노동자보다 더 나쁜 조건이어야 한다는 것. 일하는 것보다 구빈원이 나으면 사람들이 게을러진다는 논리였다.

결과는 처참했다. 구빈원은 사실상 노역장이 됐다. 가족은 분리됐다. 노인들은 구빈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바로 이 신 구빈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죽을 더 주세요(Please sir, I want some more)."

그 유명한 한 줄이 당시 구빈원의 현실을 보여준다.

결국 신 구빈법도 오래가지 못했다.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왔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현대적 복지국가로 전환했다. 국민건강보험(NHS), 실업급여, 연금.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안전망의 원형이 그때 만들어졌다.

역사의 패턴이 보인다. 기술 전환이 사람을 밀어낼 때, 처음에는 아무도 안 돕는다. 불만이 쌓인다. 터지기 직전에 국가가 개입한다. 개입은 최소한으로 시작한다. 불충분하다. 더 큰 위기가 온다. 그제야 진짜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지금 우리는 이 사이클의 어디에 있을까.

 

③ 기본소득 — 낡은 아이디어인가, 유일한 해법인가

 

 

AI 시대에 기본소득 논의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기원은 훨씬 오래됐다.

18세기 사상가 토머스 페인은 1797년 "땅의 이익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기본소득의 원형이 되는 주장을 했다. 인클로저로 공유지를 잃은 사람들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현대에 들어 가장 주목받은 실험은 핀란드다. 2017~2018년 2년간, 무작위로 선발된 실업자 2,000명에게 조건 없이 월 560유로를 지급했다. 결과는 예상을 뒤집었다. 취업률이 오르고, 정신 건강이 개선됐으며, 창업 시도가 늘었다. "돈을 공짜로 주면 일을 안 한다"는 통념이 틀렸음이 증명됐다.

한국에서도 이미 시행 중인 제도가 있다.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이다. 24세 경기도 거주 청년에게 연 100만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한다. 이재명 전 지사가 추진한 제도로, 효과에 대한 평가는 나뉘지만 논의의 출발점이 됐다.

기본소득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AI가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높일 때, 그 이익은 누가 가져가느냐. 로봇이 만든 물건의 이윤은 로봇을 소유한 소수에게 집중된다. 그 집중을 어떻게 분산시킬 것인가.

인클로저 때는 공유지의 이익이 지주에게 집중됐다. 지금은 데이터와 AI의 이익이 빅테크에 집중되고 있다. 구조가 같다.

 

④ 당신의 글이 AI를 훈련시킨다 — 공짜로

이건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다.

ChatGPT, Claude, Gemini 같은 AI들은 인터넷의 엄청난 양의 글, 이미지, 코드를 학습해서 만들어졌다. 그 글들은 누가 쓴 것인가. 기자, 작가, 블로거, 일반인,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

그 학습에 허락을 구했는가. 대부분 아니다. 보상을 지급했는가. 없다.

인클로저와 정확히 같은 구조다. 공유지(인터넷상의 콘텐츠)를 울타리 치고(AI 학습에 무단으로 사용하고) 사적 이익을 취하는(빅테크의 AI 제품으로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이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AI 학습 데이터와 저작권법 개정을 논의 중이다. 2025년 '인공지능-저작권 제도개선 협의체'가 운영됐다. 핵심 쟁점은 텍스트·데이터 마이닝 면책 규정이다. AI 회사가 저작물을 학습용으로 쓸 때 저작권자의 허락이 필요한가, 아니면 공정이용으로 볼 것인가.

EU는 이미 AI법에 저작자 보호 조항을 넣었다. 미국 저작권청은 2025년 1월 AI 생성물에 관한 보고서를 냈다. "완전 자동 생성물은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AI를 훈련시킨 원천 데이터, 즉 사람들이 쓴 글과 그림과 코드에 대한 보상은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답이 없다.

 

⑤ 국가의 개입은 언제나 늦다

역사가 말해주는 것이 하나 있다. 국가는 항상 늦게 개입한다.

구빈법은 인클로저가 이미 수백만 명을 땅에서 내쫓은 뒤에 만들어졌다. 러다이트들이 교수대에 오른 뒤에야 노동법 논의가 시작됐다. 복지국가는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겪고 나서야 만들어졌다.

지금 한국의 AI 기본법이 2026년 1월에 시행됐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포괄적인 AI 규제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보면 규제보다 진흥에 무게가 실려 있다. AI 기업들의 투명성 의무는 규정됐지만,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에 대한 안전망은 아직 별도 논의 중이다.

이건 비판이 아니다. 그냥 패턴이다. 기술이 먼저 치고 나가고, 피해가 쌓이고, 그다음에야 보호막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보호막이 충분해지기까지 또 수십 년이 걸린다.

1601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구빈법을 만들었을 때 그것이 완성된 해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법이 있었기에 이후 300년에 걸친 복지 제도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지금 AI 기본법도 같은 맥락이다.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낫다. 문제는 그 법이 실제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빠르게 보완될 것인가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